부자가 된 아내
벚꽃이 일궈가는 길목마다 따뜻한 훈기가 코끝을 간질이며 나이 불혹의 명학을 괴롭힌다.
지천명이 다가올수록 해 놓은 건 없는데 세월만 빠르게 흘러가는 게 서글프고 괜히 가슴이 아린다.
명학은 사무실 책상에 컴퓨터를 마주하고도 창 너머로 푸른 새싹이 돋아나며 꽃을 피우는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돌아보면 가진 게 없는 세월이 불편하다.
전화벨소리에 시선을 거두고 책상 달력을 펼쳐든다.
3월22일 빨갛게 동그라미 표시된 날짜에 결혼20주년인 마누라 생일이다.
아무것도 없이 빚으로 출발한 결혼으로 이제는 은행지분보다 많은 30평형대의 아파트라도 있어, 아들딸을 가진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가정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 부족한 게 많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가 미흡한 게 가장으로서의 벌이가 시원찮아 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가까운 미래, 다가오는 퇴직 후에 연금이 나온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 볼 뿐이다.
명학은 금번 생일에는 물질적인 선물보다 감동을 안겨주는 이벤트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돈(?)을 좋아하는 마누라를 위해 다른데 융통해서라도 봉투를 건네고 싶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은 현실이 못마땅하다.
지금까지 변변한 옷 한 벌 사 입지 않은 마누라의 씀씀이가 안쓰럽다.
호주머니를 뒤져본다.
책상 서랍에 꼬불쳐 둔 비상금은 고작 십 만원 남짓이다.
명학은 점심시간 자투리 짬을 내어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었으나, 십 만원으로 살수 있는 게 뭘까 목하 고민 중이다.
퇴근을 앞두고 학교 후배이기도 한 부하직원이 공부에 대한 아쉬운 미련으로 명예퇴직을 하고 싶은데, 의논을 하자며 술을 청한다.
후배의 권유를 명학은 이런저런 핑계로 둘러대고 싶었으나, 뿌리치지 못하고 가까운 선술집으로 약속을 한다.
좋은 직장을 두고 왜그러냐고 타일러도 보고 다그쳐도 보았으나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한 후배는 요지부동이다.
나이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후배의 아버지도 며칠을 두고 고민 끝에 승낙을 했단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겠다는데, 제삼자인 명학의 만류는 오히려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 ‘열심히 하라’며 후배의 어깨를 토닥인다.
“건배,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이십대 후반인 그의 결단이 부럽기도 하다.
거듭 건배를 외치는 후배의 목소리가 힘은 있었으나 서글프게 들리는 건, 자신감만으로 미래가 보장된다는 희망보다 선택한 인생이 과연 옳은가 여전히 갈등인 모양이다.
‘한잔만 더’를 외치는 후배의 유혹을 마누라 생일 그것도 결혼 20주년을 맞는 특별한 이유를 들이밀며 큰길가로 돌아서는데, 후배가 골목 까지 따라나서며 “감사합니다, 선배님!” 넙죽 배웅하는 모양이 큰 산 같아서 믿음이 간다.
답례로 손을 흔들어 주며 명학은 가까운 꽃집에 들러 스무 송이 장미 한 다발을 산다.
“결혼기념일인가 봐요”
“아, 넵. 마누라 생일입니다”
꽃집 여주인이 정성스레 색 리본을 달아주며 ‘사랑합니다. 부인’ 등 글귀를 새길 리후렛을 권한다.
“자녀가 있으세요?”
“넵, 고등학교 아들과 중학교 딸이 있습니다.”
...
따뜻한 꽃집이라 그런지 갑자기 술이 오르는 명학은 비슷한 연배의 주인 아무머니가 건네주는 리후렛을 받아서는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시각은 아홉시를 넘어 열시를 향해가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다 말고 택시를 탄다.
머리가 희끗희끗 연세 지긋한 기사가 말을 걸어온다.
“기분 좋게 한잔 하셨네요?”
“네엣~오늘 사표를 제출한 직원이랑 한잔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아니 마누라 잔소리 때문에 일찍 갑니다. 하하”
“하하하, 직업이 좋은데 왜 그만 두시죠 그분은?”
“끄억...아,...”
명학은 뒷자리에 좁은 어깨를 비스듬히 기대고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꺼내든다.
부재중 전화가 빨갛게 체크되어 있다.
딸아이의 카카오톡을 확인해보니 오늘이 엄마 생일이라고 케이크 하나 사서는 일찍 들어오란다.
“케이크! 기사님, 혹시 가시다가 빵집 있는 데 잠깐 대 주이소”
“누구 생일인가 보네요? 알겠습니다.”
“넵, 마누라 생일인데, 해준 거 없이 늘 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케이크라도 하나 사가야지요! 그라고 여기 꽃다발이면 되겠죠?”
명학이 뒤돌아보는 아저씨에게 장미다발을 자랑스레 들어 보인다.
잠깐의 침묵에 봄비가 오려는지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슴이 허전하다.
눈을 감는다.
‘산불을 내서 부자로 살겠다’는 고향 인척들의 말씀을 무슨 부적마냥 껴안고 살았는데...‘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고향에 들린 게 5월 말쯤이지 싶다.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를 찾아 부부의 인연으로 엎드려 절을 올린다. 준비해간 값싼 한복을 태우려고, 소용이 없어진 낙엽과 마른 가지들이 땅에 촘촘히 그물처럼 질퍽한 흙을 둥그렇게 밀쳐내고 구덩이를 판다.
5월에 불이 날까? 혹시나 해서 소나무 가지를 꺾어 놓고 신문지에 불을 지핀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지면이 눅눅해서 그런지 불씨가 시원찮다.
감질나게 한복으로 불이 옮겨 붙는다.
버스가 하루 2대만 오가는 늦은 일정이라 명학은 마음이 급하다.
마른 낙엽을 모아서 올리고 주변에 있는 나무 꼬챙이로 불이 붙기 시작한 신문지를 들쑤셔 본다.
불꽃이 순식간에 타오르더니 구덩이 주변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때마침 바람이 불고 불티가 날아 바짝 마른 소나무 가지로 건너가고 후다닥 불길이 치솟는다.
이미 산불이 되어버린 상황을 어쩌지 못하고 명학은 허둥대는 마누라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간다.
얼마쯤 도망을 갔을까,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있는 일흔을 훌쩍 넘긴 5촌 당숙이 낫을 들고 올라오신다.-
“빵!빵! 손님, 다왔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택시기사가 불끈 쥔 주먹을 들어 보이며 자그맣게 ‘홧-팅’하신다.
명학은 들깬 잠에 대답대신 목례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택시에서 내린 명학은 케이크와 장미꽃을 현관 계단에다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문다.
처음 결혼할 때만 해도 순진하고 예쁜 마누라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한 하루였는데, 박봉의 명학 월급으로 한푼 두푼 아껴서 대견한 아들과 귀여운 딸을 부지런히 키운 마누라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명학은 라이트를 찾으러 주머니를 뒤지다가 꽃집 아주머니가 준 리후렛를 꺼내본다.
분홍색 리후렛에 ‘뽀뽀 열 번하기’ 파란색 리후렛에 ‘한 번 안아주기’가 귀여운 글자로 새겨져 꽃집 아주머니의 센스가 눈물나게 고맙다.
명학은 아들과 딸에게 현관문 앞에 잠깐 나오라는 문자를 보낸다.
명학은 파란 띠를 두른 아들과 분홍 띠를 두른 딸을 앞세우고는 촛불로 환해진 케이크를 들고 현관에 들어선다.
“띵똥 생일축하합니다.사랑하는 우리엄마, 우리마누라!”
아들딸의 축하송에 모처럼 부자가 된 모습으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아내를, 명학은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다.